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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공부란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경험상, 독립변수인 공부의 양과 종속변수인 학점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과제나 해야지...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잡담

  1. 동기부여를 통해 의지에 호소한다.
  2.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 활용한다.
  3. 논증이 안된 내용을 기정사실화하여 전제로 삼는다.
  4. 자기에게 유리한 비유를 신속하게 선택한다.
  5. 불합리한 반대 주장을 함께 제시해 양자택일하게 한다.
  6. 내용이 없는 말을 심오하고 학술적인 말로 둔갑시킨다.
  7 상대방의 대답을 근거로 자기 주장의 진실성을 확보한다.
  8. '예'라는 대답을 얻어낼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9.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10. 말싸움을 걸어 무리한 주장을 하도록 유도한다.
  11. 뜻밖의 화를 낸다면 그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12. 상대방의 침묵은 곧 상대방의 약점이다.
  13. 상대방의 주장을 최대한 넓게 해석해 과장한다.
  14.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교묘하게 반박한다.
  15. 상대적 주장을 절대적 주장으로 바꿔 해석한다.
  16. 전문지식이 부족한 청중들을 이용해 반박한다.
  17.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지점을 찾는다.
  18. 상대방의 논거를 역이용해 반격한다.
  19. 단 하나의 반증사례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20. 사안을 일반화하여 보편적인 관점에서 반박한다.
  21. 상대방의 주장을 이미 반박된 범주 속에 집어넣는다.
  22. 틀린 증거를 빌미삼아 정당한 명제까지도 반박한다.
  23. 상대방의 궤변에는 궤변으로 맞선다.
  24. 상대방이 자신의 결론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게 한다 .
  25. 결론을 이끌어내는 질문은 두서없이 한다.
  26. 참 전제가 안 통하면 거짓 전제로 결론을 도출한다.
  27. 거짓추론과 왜곡을 통해 억지 결론을 끌어낸다.
  28. 근거가 되지 않는 답변마저도 결론의 근거로 삼는다.
  29. 개별 사인의 시인을 보편적 진리에 대한 시인으로 간주한다.
  30. 몇 가지 전제들에 대한 시인만으로도 얼른 결론을 내린다.
  31. 반격당한 부분을 세밀하게 구분해 위기를 모면한다.
  32.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쟁점을 바꾼다.
  33. 상대방에게 유리한 논거는 순환논법이라고 몰아붙인다.
  34. 질 것 같으면 진지한 태도로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35. 반론할 게 없으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고 말한다.
  36.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론 틀리다고 억지를 쓴다.
  37. 불합리한 주장을 증명하기 힘들면 아리송한 명제를 던진다.
  38. 인신공격은 최후의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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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리뷰] 하얀 늑대들 Review/Preview


윤현승의 <하얀 늑대들>을 읽고


 

 

. 서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얀 늑대들>이. 무엇보다 제일 감명 깊게 읽었으며 영향을 많이 받은 글이기도 했고, 자신의 용돈으로 구입했던 첫 번째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어느 정도 보급되기 시작한 시절, 하이텔과 나우누리 같은 PC통신을 통해 연재되다 붐을 일으켜 출판된 소설을 1세대 판타지 소설이라고 부르는데, 그 때는 D&D 세계관의 마법이나 톨킨의 종족 설정 등 바탕이 되는 배경은 있을지언정 현재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라고 부르는 틀 자체는 성립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작품 개개의 색깔이 매우 짙게 나타난다. <하얀 늑대들> 역시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그 시초로 하는 1세대 판타지 소설중 하나인데, 이 작품 역시 호불호가 갈릴 만큼 개성이 매우 강하다. 이것이 내가 <하얀 늑대들>로 감상문을 쓰게 된 또 다른 이유이다.

 

. 시놉시스

 

주인공인 카셀 노이는 평범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책을 많이 읽었으며 말재주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징이 없는 소년이다. 어른들에게 마을의 차기 촌장으로 주목받고 있긴 하지만 그뿐으로, 평소에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기사가 되어 전쟁터에서 돌아온 동네 양아치 루치와 잤다는 이야기에 반발하여 전쟁터로 뛰쳐나가게 된다.

작중 서술에 따르면 검을 제대로 배운 열 살짜리 꼬마아이에게도 종종 질만큼 검에 소질이 전혀 없는 주인공은 당연히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고, 패잔병이 되어 마을을 떠돌게 된다. 패잔병이 된 주인공 카셀은 한 술집에서 잃어버린 보검을 찾고 있는 하얀 늑대들과 마주치고, 그리고 정말로 우연히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한 노숙자가 껴안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해 교묘한 화술로 검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검을 돌려주기 위한 여행 과정 중 위기에 처해 자신이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정말로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이끄는 캡틴이 되어 수많은 위기들을 헤쳐 나가게 된다.

1부는 카셀의 조국인 카르모트에서 일어난 내전에 얽힌 이야기이다. 카르모트는 왕권이 매우 약해 검은 사자 백작이라 불리는 뤼미에르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이라 불리는 쟌스테인 백작의 내전으로 인해 피폐화된 상태였다. 이에 보다 못한 카르모트의 국왕은 예전에 친분이 있던 아란티아의 여왕에게 원군을 요청하는데, 그 원군으로 온 것이 최강의 기사단인 울프 기사단의 정예라는 하얀 늑대들이다. 하얀 늑대들은 실수로 보검을 잃어버리게 되고, 카셀이 그 검을 찾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목숨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떨었던 허풍은 결국 진실이 되고, 1부의 마지막에 결국 카셀은 진정한 하얀 늑대들의 캡틴으로 인정받는다.

2부는 주인공 일행이 아란티아로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카셀은 사고로 인해 하얀 늑대들과 떨어지게 되는 위기를 겪지만 혼자서라도 아란티아에 당도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에 카셀은 아란티아에 당도한다는 목적만을 가진 검은 기사라는 의문의 존재와 동행하는 자들에게 납치당하게 된다.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납치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전대의 하얀 늑대 중 한 명인 아이린은 제이메르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와 함께 검은 기사가 이끄는 세력을 추적하게 되지만 마지막까지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결국 제이메르가 카셀을 구해내고, 하얀 늑대들과 재회하며 2부는 끝이 난다.

3부의 배경은 루티아다. 루티아는 수많은 전설과 신비가 존재하는 하늘 산맥에 위치한 마법사들의 국가로, 실상은 작은 촌락이지만 마법이라는 존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인데, 어느 날 그 루티아가 모스라는 괴생물체들에게 습격받는다. 보통의 몬스터와는 달리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밀려 루티아에서는 동맹국인 아란티아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결국 카셀을 포함한 하얀 늑대들이 원군으로 루티아에 가게 된다.

4부는 이야기의 완결을 짓는 종점으로, 1,2,3부에 언급된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던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1000년 전엔 아란티아의 여왕인 새나디엘에게, 10년 전엔 전대 하얀 늑대들과 싸웠던 그는 결국 주인공인 카셀과 그 보검(즈토크 워그)에 의해 물리쳐지고. 카셀은 마법사의 힘을 모두 잃은 연인인 타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 특징

 

무력이 없는 주인공.

판타지(Fantasy)는 환상이라는 뜻이며, 판타지 소설은 환상 소설이다. 즉 현실에는 없는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아울러 뜻하는 말이지만, 좁은 의미로는 북유럽 신화를 배경으로 한 <반지의 제왕>이나 D&D 세계관을 배경으로 삼는 검과 마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물리적인 힘을 천시하는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이며, 따라서 독자들은 검이나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는 판타지 세계관이 일반적으로 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구조를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세계에서 플롯을 구성하기가 가장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드래곤 라자>의 경우도, 주인공 개인의 무력은 강하지 않지만 오우거 파워 건틀릿(OPG)라는 아티팩트를 가짐으로써 평범을 초월하는 힘을 얻게 된다. 먼치킨이나 메리 수(Mary sue)라고 불리는 캐릭터처럼 상식을 초월하는 힘으로 이야기를 어려움 없이 헤쳐 나가는 종류의 글이 아니라고 해도, 검이든 마법이든 신분이든 간에 주인공이 비범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얀 늑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그 중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가진 무기는 화술과 리더십이 전부로, 이야기의 처음부터 작품이 끝날 때까지 무력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륙 최강의 기사단인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는 권위를 넘어 그에게 도전해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에 어찌어찌 위기를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무력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겪게 되는 위기는 이 소설의 고정적 패턴이다. 기사를 동경하던 주인공이 무력이 우선되는 기사의 세계에서, 검과는 또 다른 강함으로 차례로 인정받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독자들은 희열을 느끼게 된다.

 

2. 매우 잘 짜여진 구성

<하얀 늑대들>에서 단연 돋보이는 장점은 잘 짜여진 구성이다. 1번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색다른 특징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스러운 존재(아란티아의 새나디엘 여왕)를 도와 만악의 근원(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을 물리친다는 자칫 고루해지기 쉬운 권선징악의 주제를 잘 살려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리저리 시점이 바뀌면서도,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독자들이 집중력을 놓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작가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2부와 3부인데, 2부에서는 카셀과 제이메르가 각각 주인공을 맡고 있고, 3부에서는 먼저 하늘 산맥으로 간 아즈윈과 게랄드가 길을 잃게 되면서 각각 시점이 나누어진 채로 진행되는데, 그 특성상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긴장감이 풀어지기 쉬운 다중시점의 단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복선을 뿌리고 회수하는 능력도 뛰어난 편인데, 일례로 작품 전체적으로는 카셀의 정신적 성장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자세한 설정이 밝혀지지 않은 1부부터 마지막인 4부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을 잃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의 힘으로 되살아난 라틸다 쟌스테인은 하얀 늑대들인 로일 울프의 연인이며 4부에서 또 다시 등장하고, 2부의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기사 역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존재였다. 3부는 그에게 공격받는 루티아를 구해내는 이야기이며, 4부에선 모든 복선이 회수된 채 주인공인 카셀에게 패배하며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또한 여행 도중 속속들이 밝혀지는 주인공의 아버지 에밀 노이의 과거도 이 소설의 또 다른 볼거리다.

 

3. 독특하고 매력적인 세계관

현재 대한민국 판타지 소설 시장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소위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 게임판타지 소설 작가인 김원호로 대표되는 이러한 작품들의 전형은 <사이케델리아> 이후 이고깽(이세계 고등학생 깽판물), 메리 수(Mary Sue) 타입의 주인공들이 쏟아져 나오며 만들어졌는데, 먼치킨형 주인공뿐 아니라 천편일률적인 소재와 전개, 거기에 엉망인 고증과 군데군데 개연성의 부재로 인해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양판소들은 판타지 소설을 포함한 장르문학을 상대적으로 저평가하게 만드는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이며, 작품에 대한 깊은 사색 없이 여기저기서 가져 온 클리셰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매우 낮다. 작가-독자의 연령대가 구 판타지나 순수문학에 비해 비교적 어리다는 것도 특징이며, 전형적인 자기만족형 소설이 주를 이루는 장르소설의 암적인 존재이다.


<그림 1> 양판소. 발음이 똑같다는 것을 이용한 말장난. (출처:http://homa.egloos.com/4045251)


양판소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는 <사이케델리아>는 시대적 분류로 보면 2세대 판타지에 속하는 작품인데, 그 때문인지 1세대 판타지 소설 중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품마다의 개성이 짙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지닌 작품들이 많은데 <하얀 늑대들>역시 그러한 축에 속한다.

그 첫 번째가 하늘 산맥이라는 소재다. 하늘 산맥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으로, 허락받지 못한 사람은 길을 잃게 되는 드래곤들의 신성한 둥지이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대부분의 전설은 이 하늘 산맥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에게는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엘프들 또한 이곳에 살고 있고 대륙 마법의 총본산인 루티아 또한 이곳에 위치한다. 또 주인공이 몸담게 된 울프 기사단, 그들이 속한 아란티아를 신비하고 성스럽게 하는 것 역시 하늘 산맥의 존재이다. 검기나 검강처럼 초현실적 능력이 터부시되는 이 세계관에서 하늘 산맥은 모든 오컬트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이며, 환상 소설의 현실과 괴리된 환상이라는 소재는 독자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두 번째는 아란티아의 새다니엘 여왕이다. 아란티아를 천 년 가까이 지배한 여왕으로 대륙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그녀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맞서 싸운 천 년 전의 하얀 늑대로 드래곤들의 여신인 사-나딜의 딸과 같은 인간이다. 절대악인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대비되는 성스러우며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이러한 상징성과 어떤 면에선 어울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지만, 그 언밸런스가 일차적으로 이 한 캐릭터의 매력을, 나아가서는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 준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 마치며

 

<하얀 늑대들>을 처음 접했을 때, 손에 땀을 쥐며 밤을 새서 전권을 독파했던 기억이 있다. 같은 1세대 작가라도 <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의 이영도는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철학적 화두나 언어유희, 치밀한 설정과 감칠맛 나는 필력으로, <룬의 아이들>, <세월의 돌>로 대표되는 전민희는 미려한 문체와 섬세한 묘사, 매력적인 캐릭터와 감성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마찬가지로 1세대 판타지 작가인 <하얀 늑대들>의 윤현승은 짜임새 있는 플롯과 세계관에 더해,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이끄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대되는 것은 작가 윤현승이 <다크 문>을 지나 <하얀 늑대들>의 성공에서 안주하지 않고, 후속작인 <더스크 워치>, <라크리모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글솜씨가 어느 정도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정말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윤현승은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작가 윤현승이 앞으로도 무궁히 발전하기를 빌며, 이만 이번 감상문을 마치기로 한다.




[리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터널의 저편, 우리 세상의 저편 Review/Preview

터널의 저편, 우리 세상의 저편



Ⅰ. 서론 : 그때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짚으며


“ 터널의 저편은 신기한 마을이었습니다. ”
어렸을 때는 터널에 대한 묘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너무 늙어버린, 나와 나이가 같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길다란 터널을 지날 때면 느껴지던 묘한 기분. 마치 터널 이 편과 저 편의 세상은 뭔가 다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착각인 줄 알면서도 어린 마음에 늘 살짝 들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세상으로의 동경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는데, 생각해보면 난 그때부터 조금은 삐딱했던 아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인간이 산을 뚫고 바다에 다리를 놓기 전까지만 해도 높디높은 장애물로 가로막힌 저 너머의 도시는, 산을 넘을 필요가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굳이 먼 옛날까지 시간을 확대시키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김동환의 시구인 “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 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엿볼 수가 있는데, 인간에게 지각할 수 없는 장애물 너머는 입맛대로 상상할 수 있는, 지긋지긋한 현실과는 격리된 새롭고 찬란한 무언가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다른 세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세계 곳곳의 여러 신화나, 전설이나, 혹은 여러 소설 따위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클리셰다.
예를 들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그곳은 설국(雪國)이었다. ”.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의 첫 문장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작품에서 패러디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감상문을 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문장이 바로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인데, 위 문장에서 볼 수 있듯 이 이야기는 시골로 이사를 오게 된 주인공 치히로의 가족이 터널을 지나 이상한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치히로의 부모님은 그곳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돼지로 변해버리고,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방황하던 치히로는 결국 그 세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마녀 유바바에 의해 이름을 잃어버린 채 밤이면 갖가지 정령과 귀신들이 모이는 온천장의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들이 늘 그렇듯, 주인공은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해진 채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답게, 이 이야기의 곳곳에는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부분들이 산재해 있다. 오물로 뒤덮인 강의 신에서 엿볼 수 있는 환경파괴의 문제라거나, 탐욕스러운 마녀 유바바와 자연에 묻혀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쌍둥이 제니바의 대비에서 나타나는 무절제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어렸을 때는 재미있게만 보고서 그냥 지나쳤던 이러한 점들을 중점으로, 이번 글에서는 이 작품의 색깔과 내포하고 있는 시사점들에 대해서 입맛대로 파헤쳐 볼 것이다.



Ⅱ. 본론 : 작품의 특징


1.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 일본의 애니미즘 – 신토(神道)

애니미즘은 무생물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신앙으로 많은 다신교계 신화의 기원이 되며, 특히 수억의 신을 모시는 힌두교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토는 신토불이의 약자가 아닌 애니미즘을 기원으로 하는 일본의 토속 종교로, 삼라만상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 개수만큼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야오요로즈(八百万:팔백만)의 신이라고도 할 만큼 그 신의 수효가 많다.(물론 팔백만은 실제 숫자가 아닌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의 비유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온천장과 일본의 신토 신앙은 관련이 깊은데, 왜냐면 유바바가 주인으로 있으며 주인공이 일하고 있는 이 온천장이 밤이 되면 온갖 신과 귀신이 다녀가는 백귀야행(百鬼夜行:밤에 온갖 요괴가 돌아다님)의 휴양지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도 요괴 혹은 신으로, 대표적인 예로 남주인공인 하쿠의 본명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饒速 琥珀主)로, 원래는 바깥세상의 강의 신이며 이야기의 주요 인물(?)인 가오나시 또한 얼굴이 없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요괴이다. 이러한 ‘귀신의 세계’라는 배경은 작품 전체에 기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들 ‘귀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주인공의 가족은 실수로 터널을 지나 ‘귀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의 음식을 먹은 부모님은 봉변을 당하게 된다.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본 치히로는 공황 상태에 빠져 원래 자신이 속한 곳인 ‘인간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귀신의 세계’에 그대로 갇혀 버리고 만다. 작품의 제목에 들어있는 ‘행방불명’은 일본어로 神隱し(카미카쿠시)라고 하는데, 이는 직역하면 ‘신이 (아이를) 숨겼다’는 뜻이니 참으로 절묘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보고서를 쓰면서 원어로 된 제목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때 느꼈던 점은 역시 아무리 잘 된 번역이라도 약간은 원작에 미진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어에는 한자의 훈음과 독음을 이용한 소소한 언어유희나 말장난이 많은 편인데 그런 것을 타국어로 완전하게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예를 들어 치히로(千尋)가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새로 받은 이름이 센(千)인데, 사라진 글자인 尋에는 ‘찾는다’는 뜻이 있어 치히로(千尋)는 센(千)이 자신을 찾는다(尋)는 의미가 숨겨져 있으며 가오나시(顔なし) 또한 ‘얼굴 없는’ 이라는 뜻으로 얼굴이 없고 입만 있는 일본의 요괴이지만, 일본어가 안 되는 우리가 보기에는 표정이 제 맘대로 변하는 가면이 얼굴인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알고 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보고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품 그대로도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이렇게 작품만 보고서는 알 수 없는 지식을 찾아보는 것도 작품의 소소한 재미가 아닐까?

저 세상과의 경계가 닫히고, 몸이 투명하게 되어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한 치히로가 이 세상의 음식을 먹고 존재를 되찾는 장면. 나는 이 장면에서 왠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승의 석류알을 먹고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저승의 여왕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1.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 터널

이 작품에서 ‘인간의 세계’와 ‘귀신의 세계’는 물리적으로 거의 완전히 격리되어 있으며, 두 세계를 잇는 유일한 통로는 길다란 터널이다. 이는 서론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설국(雪國)>의 오마주라고 생각되는데, 실제로도 두 작품에서 터널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터널을 지나면 그곳은 눈의 고장이었다던지, 혹은 터널을 지나면 신기한 마을이었다던지. 차이점이라면 <설국(雪國)>에서 터널 저편의 세상은 깨끗하고 맑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현실에서 무기력한 주인공의 안식처인 반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간 주인공이 온갖 고생을 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장소라는 점이다.

2. 현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학생 때부터 늘 들어왔던 것처럼, 글은 읽을 때 그대로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영상 매체도 마찬가지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원작과 각본을 쓴 이 작품에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몇 가지 화두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 자연 파괴에 대한 경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환경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그 주제는 그의 작품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로 전작인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 그런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본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그는 그 주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자연 파괴라는 주제는 크게 두 등장인물로 대표되는데, 그 첫 번째는 오물로 뒤덮인 강의 신이다. 어느 날 유바바의 온천장에 오물이 줄줄 흐르는 오물신이 손님으로 찾아오게 된다. 온갖 더러움을 뭉쳐 놓은 것 같은 생김새에,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그이지만 손님이기에 쫓아낼 수는 없고. 결국 유바바는 심술을 부려 주인공에게 그를 접대하도록 한다.
센은 그의 목욕 시중을 들다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오물로 뒤덮여 있는 그의 몸에 무언가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센은 그 사실을 온천장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바바는 무언가를 눈치 채고 온천장의 사람들을 모두 모아 그의 몸에 박혀 있는 쓰레기를 뽑아내도록 한다. 결국 사람들의 단합에 의해 더러움을 벗은 오물신은 본 모습인 강의 용신(龍神)으로 변해, 하늘을 날아 사라지게 된다. 이 때 센이 그에게 받은 쓴 단약은,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강의 신이 오물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자연 파괴를 나타낸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고, 아마 온천장 사람들이 힘을 모아 쓰레기를 뽑아내는 장면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다시 깨끗해진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두 번째는 남자 주인공이기도 한 하쿠이다. 하쿠의 원래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饒速 琥珀主)라고 하는데, 코하쿠누시는 ‘코하쿠 강의 신’이라고 하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사는 강 주변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결국 더러워진 자신의 터전에서 살지 못하게 되자 마법을 배우기 위해 유바바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유바바의 제자가 된 그는 이름을 빼앗긴 채,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센이 이름을 찾아줄 때까지 유바바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에 대립하기도, 자연과 함께하기도 한다. ‘귀신의 세계’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인 센에 의해, 오염된 자연을 상징하는 하쿠가 자기 자신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은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가 던져주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일 것이다.

2-2. 무절제와 탐욕에 대한 비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인물의 대비가 곳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거대한 온천장을 운영하지만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유바바와, 그녀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 마녀이지만 조용한 곳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는데다 성격 또한 다정다감한 제니바가 그러하고, 생쥐로 변한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바바와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한눈에 알아보는 센이 그러하다. 똑같이 생겼지만 성격이 반대인 쌍둥이 언니에 의해 부각된 유바바의 부정적인 면은, 뚱뚱한 생쥐로 변해버린 자신의 사랑하는(실제로 그렇게 사랑하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거기에 더해, 돼지가 되어버린 부모님을 한 눈에 알아맞히는 센과 비교하여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바바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거의 유일한 악역이자 탐욕스러운 인간을 상징하는 부정적 인간의 상이며, 제니바는 그와 거울상처럼 정확히 대비되는 조력자이자 작가가 지향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인간상이다.
유바바와 똑같이 작중에서 탐욕을 상징하는 캐릭터는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얼굴 없는 요괴인 가오나시이다. 작중에서 가오나시는 흙으로 만든 가짜 금을 뿌리며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며, 그들이 바친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다 결국 종업원들까지 먹어치우게 된다. 그러나 얼굴이 없고 입만 존재하는 가오나시는 욕심에 찌든 인간인 유바바와 다르게, 순수하게 식욕, 즉 한 발 더 나아가 욕망을 형상화한 존재로 묘사되는데, 뭐든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지만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센 하나뿐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그가 유바바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인물상- 즉 비판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작가가 하고픈 말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적 장치에 가깝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Ⅲ. 결론 : 마치며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초등학교 때에 직접 극장에 가서 보았다. 아직 어렸던 나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치히로에게 그대로 몰입해서,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떨면서도 꾹 참고 마지막까지 보았던 기억이 남는데 그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최초의 영화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후에 자라나면서도 영화관에 갈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처음 이 블로그에 첫 포스팅을 하려고 했을 때, 제일 처음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서론에서 유난히도 뜬금없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그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즐겁게 따라갔었던 이야기 그대로를 다시 한 번 분석하며 되짚어보는 것은 어딘가 쓸쓸한 느낌도 들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즐거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팅을 계기로 이렇게 이미 읽었던 이야기를 뒤돌아보게 되면, 처음 읽었던 기억은 이제 희미해져 감상문보다는 비평글에 가깝게 글이 써지는 것이 느껴지는 것은 유감이지만.
마지막으로 써 내려간 글을 다시 한 번 퇴고하면서, 또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한 줄만 알았던(사실 이 전작인 <모노노케 히메>가 은퇴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다음 이 작품이 나왔고, 그 후에도 최근에 <벼랑 위의 포뇨>의 감독도 맡으면서 사실상 은퇴 시기는 불명확한 것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이번 리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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